본문 바로가기
소재별/사회

수학여행의 유래 - 일제 영향에 관한 문헌기록들

by 전략가8 2014. 10. 7.
반응형

출처 : http://lopis.blog.me/50193013071

 

 

신유년(1921년)의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지금의 휘문고) 4학년생들의 경주 수학여행 사진



1. 高橋敏(1978), 『日本民衆教育史研究』, 未来社, 1978 (다카하시 사토시 <일본 민중교육사 연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2295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의 단체행사를 고안한 사람들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 그 해답은 메이지(1868~1911년) 시기의 일본 학교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978년에 일본 역사학자인 다카하시 사토시가 저술하고 미라이사(社)가 발행한 <일본 민중교육사 연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다카하시는 현재의 시즈오카현 이와타군 후쿠다마치의 도요하마 소학교의 <교무일지>를 바탕으로 메이지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근대 교육이 정착했는지를 밝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학교에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의 단체 행사가 정착된 과정과 그 배후의 의도를 규명하려 했다. 

 

도요하마 소학교의 <교무일지>에서 운동회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때는 1887년 1월 17일이다. 바닷가에서 열린 운동회에서 학생들은 깃발 뺏기, 투구 경쟁 등의 전투적 놀이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88년부터는 운동회가 정식으로 학교 행사가 되었다. 이 시기의 조선은 갑신정변(1884년) 이후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과 청·일 양국의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 30년(1897)이 되면, 학교 행사가 한층 더 제도화되어 시업식, 졸업증서 수여식, 입학식 등의 다양한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진다. 

 

또 메이지 30년대(1897~1906년)에는 종래의 운동회에서 소풍이 분화하였고, 메이지 40년대(1907년 이후)에는 수학여행까지 생겨났다. 한편, 메이지 36년(1903) 1월 31일 처음 개최된 학부모 간담회는 메이지 44년(1911) 3월 27일에는 학예회 및 학부모 간담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사들의 표면적 특징은 학생과 학부모들을 학교로 불러들인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이들을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찬조금을 거두거나 혹은 은밀히 촌지를 받을 목적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학교를 통한 근대국가 창출이라는 메이지 지도부의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메이지 이전 시기의 일본인들은 중앙에 있는 국가의 존재를 잘 몰랐다. 에도시대(1603~1867년)의 일본 민중들은 지방의 봉건적 권력자들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중앙권력을 알지 못하는 민중들을 새로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 체제에 편입시키려면 뭔가 특별한 방식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특별한 방식이라는 것은, 학교를 매개로 지방 민중들을 중앙의 국가권력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배경 하에서 메이지 시기의 일선 교사들은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의 행사를 통해 학생과 학부모를 학교로 아니 국가로 ‘동원’하는 데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새로 생긴 학예회 등의 축제를 즐기는 과정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은 은연중에 중앙집권적 국가에 통합되어 갔다. 특히 학예회 행사 중에는 국왕(소위 천황)의 칙어를 낭독하는 프로그램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국왕 중심의 권력구조에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이전 시기만 해도 일본 민중들은 오늘날처럼 소위 ‘천황’을 숭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일본인들이 국왕 숭배에 빠진 것은 메이지 이후 교육의 영향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학교의 단체행사가 산출한 또 다른 효과는, 이것이 종래의 전통 축제가 갖고 있던 기능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무라(村, 마을)를 무대로 자체적 축제를 즐기던 일본 민중들은, 메이지 이후에는 국가가 학교를 통해 열어 주는 ‘이벤트’를 즐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라 중심의 전통적 사고에서 국가 중심의 새로운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이 메이지 정부의 작품인 학예회·운동회·수학여행 등은 전통적 생활구조에 익숙해 있던 일본 민중들을 소위 ‘천황제’ 국가 구조에 편입시키는 기능을 하였다는 것이 다카하시 사토시의 결론이다. 

 

 

2. Grand Tour 유래설의 문제점과 식민지 교육관리 정책

http://www.dailian.co.kr/news/view/433299


수학여행의 기원을 유럽의 귀족 자제들의 여행에서 찾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다. '유럽 대륙 순회 여행'(Grand Tour)이라는 귀족 자제들의 여행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1-2년 정도 여행을 시켰다는 점이 2박 3일이나 3박 4일의 수학여행일정과 확연히 다르다. 또한 귀족 자제들의 여행은 대중교육기관에서 집단으로 행하는 여행과는 다르다. 조선시대 양반자제들이 행한 여행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수학여행은 대중교육기관에서 집단적으로 시행된 학생여행 제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여행은 일본근대화의 산물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1907년 수학여행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1910년부터 조선과 만주를 오가는 13박 14일의 수학여행을 만들어낸다. ( http://tvpot.daum.net/v/v291bty343c1PBBaeBBKleB : EBS 지식채널e, 두 개의 시선 참조)하지만 결코 근대화의 바람직한 요인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수학여행을 통해 일본은 학생들을 집체교육의 대상으로 삼는다. 


대규모 여행과정에서 학생들은 통제의 대상이 되며, 그 가운데 집단적인 야외 여행의 조직적 행동을 습득하게 된다. 또한 조선의 학생들을 일본에 수학여행을 보내 조선반도를 자학하고, 열도를 우러르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20년대 거부동맹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3. 추천도서: 역사교육자협의회, <학교사로 읽는 일본근현대사>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12531


'1부 학교의 역사를 안다'에서는 메이지기, 다이쇼기, 쇼와전전기, 전후기로 나누어 시기별로 수업료, 학교의 휴일, 수업시작을 알리는 신호음, 문구와 교구의 보급 등 학교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장치들의 역사와 청일.러일 전쟁 때, 메이지 천황의 '붕어' 때, 패전의 날, 미군의 주둔 때 등 주요 사건과 관련된 학교의 모습을 소개한다.


또한 아이누학교와 오키나와의 황민화교육·동화교육, 한센병 환자들을 모아놓은 젠쇼학원의 격리정책, 전후 혼란기 속에서 의무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야간중학 등 체제에 흡수되지 못한 학교들의 역사를 들려준다. '2부 학교의 역사를 조사한다'에서는 학교건물과 보건실, 운동회와 소풍, 수학여행, 시험 등 주요 구성 요소와 학교 행사 들의 변천을 통해 학교사를 조망한다.


마지막으로 '3부 학교의 역사를 공부한다'에서는 학교사나 지역의 역사를 발견해 수업에 활용한 실천 사례를 소개하는데, 이는 학교사가 학생들에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사학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우리가 어떻게 학교사를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댓글